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정희 정부/평가/긍정적 평가 (문단 편집) ==== [[경부고속도로]] 개통 ==== || {{{#ffffff '''경부고속도로 준공'''}}}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0V1zYzTRUeE)]}}} || 박정희 정부는 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동안 과거 일본 제국처럼 철도 중심의 개발을 하였고, 당시에도 사회 전반에서도 도로에 대한 요구가 조금씩 생겨났으나, 2차 경제 개발 계획에서도 철도 예산이 도로 예산의 3.5배로 책정되는 등 여전히 철도 중심의 개발이 지속되었다.[* 경향신문 1966년 6월 10일 2면 중앙] 그럼에도 도로의 수요 증가량, 전망이 여객, 물류 두 부분 면에서 철도를 압도한다는 결과가 속출하는 가운데[* 경향신문 1966년 6월 20일] 박정희는 1968년 서울-부산을 잇는 상당히 파격적인 대규모 고속도로 사업을 발표하였고[* 당시 건설부 장관이던 주원의 회고록에 따르면 박정희는 집권초부터 고속도로 건설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고 1964년 12월 독일을 방문했을 당시 연장 20킬로미터였던 본-쾰른 간의 아우토반에 영감을 받아 대규모 고속도로 건설을 결심했다고 한다.], 이는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 사업이라 불릴 만큼 총 공사비 429억 7,300만 원으로 국가 예산의 23.6%를 차지한 만큼의 무모한 사업이었기에 야당과 언론의 상당한 반발을 겪게 된다.[* 야당인 신민당에선 김대중은 "가뜩이나 전라도에서 현 정권에 대해 불만 운운하는 이때에 같은 국토 내에서 어찌하여 한쪽은 철도 복선화가 있는 곳에 다시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파행을 하는가"라며 "부유층을 위한 호화시설이 될 뿐"이라며 반발했고, 유진오 신민당 당수는 박정희를 히틀러에 비유하며 아우토반의 예를 들며 독재자는 거대한 건축물을 남기길 좋아한다며 비판했다, 심지어 여당인 공화당 지도부와 경제기획원 재무부 같은 정부 부처조차 반기를 들어 당시 건설을 주도했던 건설부와 마찰을 빚어, 당시 건설부 장관인 주원의 회고록에 따르면, 주원은 고속도로 건설사업 과정에서 예산 당국과 미리 절충하고 경제기획원을 거쳐 청와대로 최종 결재를 받으러 가는 게 아니라 대통령의 양해부터 미리 받아내 그 증표를 호주머니에 넣고 경제기획원으로 향하곤 했다고 한다.] 결국 사업은 진척되어 1967년, 대국토계획기본구상이 수정 보완되어 대국토건설계획서안이 나온 이래로, 경인 6차선 등이 최초로 정부 문서에 명문화 되었고 이후 우선순위 논쟁을 거치며 경부고속도로 건설사업은 시작되었다. 그 결과, 1968년 12월 21일 우리나라 첫 고속도로인 서울-인천 간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되었고, 1970년 7월 7일에는 연장 428km, 4차선인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1973년에는 연장 251.8km, 2차선인 대전-순천 간 [[호남고속도로]]와 연장 176.5km, 2차선인 남해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영남지방과 호남지방을 연결하게 되었다. 또한 1975년에는 연장 201킬로미터, 2차선인 수원-강릉 간 [[영동고속도로]]가 완공되어 수도권과 영동지방을 연결하게 되었다. 고속도로가 만들어진 후 철도 위주의 수송 구조가 도로로 바뀌었고, 전국이 일일 생활권으로 연결되었다. 이에 따라 공업단지도 전국 곳곳에 건설되었고, 산업 발전과 산업 생산성도 증가했다, 현재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신화 창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경부고속도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